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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예술가ㆍ학생이 ‘만능공장’ 을지로 지키기 나선 이유는

입력 2019.10.22 09:00

수정 2019.10.22 09:35

 예술가, 미대ㆍ건축학과 작품ㆍ과제 원스톱 처리하던 을지로 제조 상가 
 재개발 움직임 가속화…“‘힙지로’ 인기 을지로 한 번 무너지면 복구할 길 없어”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가 ‘청계천-을지로 재개발 반대 포스터 궐기 대회’를 통해 응모받은 포스터 작품.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제공

“예술가와 메이커, 디자이너를 기만하고 진행하는 도시재생을 반대한다.”

12일 서울 중구 을지로3가역 인근 ‘제2회 메이드 인 을지로 페스티벌’ 행사장에 마련된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 부스 안. 부스 한켠에 설치된 가벽에는 전국의 예술가, 디자이너, 시민이 보낸 ‘을지로 재개발 반대’ 포스터 수십 장이 부착돼 있었다.

서울시가 추진하는 재개발 문제로 시끄러운 을지로3가역 주변에서 이날 두 번째 메이드 인 을지로 페스티벌이 열렸다. 메이드 인 을지로 페스티벌은 보존연대에 소속된 2030세대 예술가와 을지로 일대 소상공인들이 을지로 보존의 필요성을 홍보하기 위해 기획한 행사였다. 행사장에는 재개발 반대 활동 내용이 전시됐고, 을지로 일대의 제조업 생태계를 확인할 수 있는 ‘청계천-을지로 투어’도 진행됐다.

12일 수표동, 입정동 일대에서 청계천-을지로보존연대가 진행한 '청계천-을지로 투어' 현장. 우아현씨 제공

‘힙지로(최신 유행에 앞서 있다는 뜻의 ‘힙ㆍhip’+을지로)라 불리며 최근 2030에게 각광받고 있는 을지로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이다. 이곳엔 젊은 세대의 트렌드 성지로 꼽히는 뉴트로 감성 카페와 바는 물론 몇 십 년간 수만 명의 제조업 장인들이 형성해 온 도심형 제조ㆍ상업 지구가 모여 있기도 하다.

그런 을지로가 재개발 문제를 두고 논란에 휩싸였다. 서울시가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자 서울권 대학생들이 “을지로를 지키자”며 반대에 나섰기 때문이다. 을지로 재개발 사업은 을지로, 청계천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오래된 도심형 경공업, 상업지구를 철거해 주거용 아파트 단지를 조성하는 사업이다. 일부 구역은 이미 철거가 진행됐고 나머지 구역에서도 재개발 절차가 진행 중이다.

투어 행사에 참여한 서울 지역 미과대 학생 우아현(22)씨는 “을지로가 현재 재개발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오늘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며 "을지로 구역 재개발에 반대한다”고 답했다. 왜 학생들은 을지로 일대를 수호하기 위해 목소리를 높이고 있을까.

 
 ◇한국에서 유일무이한 규모의 제조지구, 을지로 

을지로 일대의 제조지구를 한 마디로 정의하면 ‘상상하는 모든 것을 만들 수 있는 거대한 공장’이다. 이곳을 방문한 젊은 예술가나 미대, 건축학과 학생은 재료 구입부터 상담, 제작까지 작업에 필요한 많은 것을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졸업 전시회를 준비하기 위해서 을지로에 자주 왔어요. 한 가게에서 재료를 구하면, 가까운 가게에서 용접하고, 다른 가게에서는 마감 작업을 하는 식으로 진행해 완성품을 금방 만들 수 있어요.”

이화여대 조형예술대학에 재학중인 A(23)씨는 한 지역 내에서 모든 공정이 가능한 곳은 전국에서 을지로가 유일하다고 말한다. 학생들 사이에서 ‘만능공장’으로 통하는 을지로 일대에는 소규모 제조업체들이 밀집해 있다. 주물, 용접, 금속재료 판매 등 서로 다른 전문 분야를 갖고 있어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는 긴밀한 협업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특정 기계를 만든다고 가정했을 때 A 가게에는 해당 기계를 수리하는 데 필요한 도구와 부품이 있고 B 가게에는 기계를 마감 처리할 때 필요한 재료가 갖춰져 있는 식이다.

또 을지로는 이 곳을 찾는 학생들이 조언을 구할 수 있는 ‘테크니션’이 즐비한 장소이자, 모든 실험이 가능한 ‘실험실’ 이기도 하다. 미대생 우씨는 을지로 장인들이 학생들에게 기술적 조언을 해주는 테크니션과 다를 바 없다고 설명했다. 테크니션이란 예술가가 작품을 구현할 수 있도록 기술적인 도움과 조언을 해주는 전문가를 뜻한다. 우씨는 “테크니션이 상시 대기하고 있는 해외 유명 미대들과 달리, 대다수 국내 대학에는 테크니션의 수가 적다”며 “테크니션에 대한 학생들의 목마름을 일부 해소시켜준 것이 바로 을지로 장인”이라고 말했다.

을지로에서는 원하는 부품을 부담 없이 소량 주문할 수 있어 새로운 작업을 위한 실험도 가능하다. 보통 작품에 필요한 맞춤형 부품 수량은 1~2개다. 기본 천 단위 수량부터 발주를 넣을 수 있는 다른 지역의 제조공장과 달리 을지로에서는 맞춤형 부품 소량 제작 주문도 흔쾌히 받아준다고 한다. 그 덕에 “을지로 거리에서는 개인 인공위성, 3D 프린터기를 제작하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 나온다.

 ◇한 번 사라지면 언제 되살릴 수 있을지 몰라 
수표동 일대에 위치한 제조공장 주인이 투어 참가자들에게 작업 내용을 설명하고 있다, 우아현씨 제공

견고해 보이는 을지로 일대의 제조지구는, 사실 그 어떤 곳보다 무너지기 쉬운 구조다. 각각의 가게가 긴밀하게 얽혀 있어 한 곳만 폐점해도 다른 가게도 줄줄이 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보존연대에 따르면 을지로 재개발이 진행될 경우 이 곳에서 일하던 2만5,000여명이 일자리를 잃고 뿔뿔이 흩어진다. 을지로 규모의 제조지구가 다시 생성되기까지 얼마나 걸릴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화여대 건축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B씨는 을지로가 재개발 된다면 수도권 뿐만 아니라 지방에서 예술 작업을 하는 학생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는 “이곳과 관련 없어 보이는 거대 제조업체도 을지로 업체에 하청을 주는 경우가 많다”며 “을지로 거리의 가치와 영향력은 수도권에만 한정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이어 “수도권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학생, 예술가가 아니더라도 대한민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는 이들이라면 이미 알게 모르게 을지로 거리의 도움을 많이 받고 있다”고 덧붙였다.

2월 19일 열린 청계천-을지로 재개발 반대 포스터 궐기대회 모습. 우아현씨 제공

보존연대는 을지로를 애용하던 젊은 세대가 이곳의 소중함에 깊이 공감해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반대 운동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보존연대 소속 천채경(27)씨는 “다른 재개발 지역도 중요하지만 을지로는 늘 써오던 공간이다 보니까 우리 집이 철거되는 느낌과 비슷하다”며 “늘 가던 공간, 늘 소통하던 분들이 내몰리게 생겼으니 느끼는 온도 자체가 다른 것 같다”고 답했다.

함께 활동하는 박은선(39)씨는 “낡은 데는 고치고 수리하되, 이 골목의 장인분들이 기술을 이전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으면 좋겠다”며 “도시재생이라는 명목으로 무작정 재개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이분들이 만들어온 가치를 존중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한채영 인턴기자 digit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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